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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인구가 상권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러닝이라는 문화가 서촌·북촌을 새로운 리테일 무대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유동인구가 상권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러닝이라는 문화가 서촌·북촌을 새로운 리테일 무대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유동인구가 상권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러닝이라는 문화가 서촌·북촌을 새로운 리테일 무대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Article Highlights

1. 서촌·북촌은 완만한 지형, 한국적 정취, 골목마다 숨은 F&B를 발견하는 재미가 맞물려, 단순한 러닝 코스를 넘어 운동과 여가가 이어지는 러너들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2. 이제 브랜드는 유동인구를 좇는 대신 러닝이라는 문화와 커뮤니티 위에 올라타는 방식을 택하며, 매장을 판매 공간이 아니라 그 문화의 맥락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거점으로 삼는다.

3. 러닝이 만든 상권은 '유동인구가 상권을 만든다'는 전통 공식을 뒤집어 '문화가 상권을 만든다'는 전환을 보여주며, 서울 고유의 고궁 러닝 코스는 '투어 런'으로 확장되어 글로벌 러너를 불러들이는 K-컬처의 다음 장이 될 잠재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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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러닝은 어느새 서울을 경험하는 가장 힙한 방식이 됐고, 그 변화는 조용히 상권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러닝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은 데에는 몇 가지 흐름이 겹쳐 있다. 대표적인 것이 GPS런이다. GPS 위치 기록을 남기며 달려 지도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이 러닝은, 다양한 모양의 코스가 등장하면서 SNS 콘텐츠로 확산됐고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퍼진 이 문화는 러닝을 개인의 운동에서 '놀이 콘텐츠'이자 '크루 중심의 커뮤니티 문화'로 재정의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경험을 남기며 달렸는지가 중요해진 흐름과 맞물리면서 러닝은 서울을 표현하는 문화적 코드로 올라섰다.

이 변화의 밑바탕에는 '덜 마시는' 라이프스타일로의 전환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의 1인당 순수 알코올 소비량은 2015년 9.1리터로 정점을 찍은 뒤 꾸준한 감소세에 접어들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2). 성인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술을 마신 비율을 뜻하는 월간 음주율 역시 2016년 62%에서 2022년 57%로 낮아졌다(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의 주류 소비는 2015년 이후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빠른 속도로 줄었다(OECD, 2025). 밤의 음주 문화가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러닝이다.

그 결과 저녁 술자리 대신, 아침이나 저녁에 달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소통하는 '에스프레소런'이 확산됐다. SMCC(Seoul Morning Coffee Club) 같은 커뮤니티가 이끄는 에스프레소런이 대표적이다. 커피와 음악, 디제잉을 함께 즐기는 모닝 커피 레이브 역시 글로벌 트렌드로 번졌고, 국내에서는 SMCC가 이를 진행하는 한편 스타벅스가 성수에서 관련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려는 수요가 이런 문화를 트렌드로 밀어올리고 있다.

러너들이 특정 동네로 모이는 이유


러너들의 발걸음이 특정 코스로 몰리자, 글로벌 스포츠·패션 브랜드들은 러닝 코스의 핵심 거점에 전략 매장을 열기 시작했다. 매장을 물건 파는 곳이 아니라 '러너들의 베이스캠프'로 체질을 바꾼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서촌과 북촌일까. 러닝 코스로 삼을 만한 곳은 서울에 많다. 그럼에도 브랜드들이 이 두 동네에 집중하는 데에는 단순히 '달리기 좋은 길' 이상의 이유가 있다.

먼저 지형이다. 러너들에게 코스의 높낮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변수다. 서촌과 북촌은 경복궁과 고궁 담장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이 많아, 가파른 오르내림 없이 꾸준한 페이스로 달리기에 적합하다. 한강변이 탁 트인 직선 코스의 매력을 준다면, 이곳은 부담 없는 지형 위에 도심의 풍경이 얹힌 균형점을 제공한다.


다음은 정취다. 강남역이나 홍대 중심가가 복잡하고 상업적인 반면, 서촌과 북촌은 돌담길과 한옥이 만드는 고즈넉한 풍경을 품고 있다. 고궁 담장을 끼고 달리는 이른바 '고궁 러닝'은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서울만의 장면이다. 바쁜 도심 한복판에서 문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감각, 그 이색적인 경험이 코스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만든다.


무엇보다 이 동네는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좁은 골목마다 감성적인 카페와 편집숍, 작은 F&B가 촘촘히 숨어 있어, 달리다 멈춰 서서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는 즐거움이 있다. 러너들은 이제 달리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달린 뒤 커피 한 잔, 브런치, 힙한 동네 산책으로 이어지는 소셜라이징까지가 하나의 완성된 러닝 루틴이다. 코스 곳곳에 여가를 이어갈 거점이 인접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거점을 스스로 발견하는 재미가 서촌과 북촌의 접근성을 높이는 진짜 이유다.


실제로 서촌 일대에서 열리는 한 에스프레소런 모임의 코스는 러닝 편집숍에서 출발해 오래된 다방과 카페를 지나 청와대와 경복궁을 거쳐 다시 서촌의 카페에서 마무리된다. 달리기와 커피, 고궁 산책이 하나의 동선으로 자연스럽게 엮이는 것이다.

서촌·북촌: 고궁과 시티런의 거점


반짝 떴다 사라지는 여느 유행과 달리, 러닝은 이 시대의 문화와 마인드셋이 투영된 흐름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리테일 시장의 지형까지 바꿔놓고 있다. 특히 서촌과 북촌 권역에는 러닝을 매개로 한 브랜드 거점이 빠르게 들어서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아디다스 퍼포먼스 서촌은 반려견과 함께 달리는 '댕댕런'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앞서 문을 연 북촌 헤리티지 스토어가 관광 상권을 겨냥했다면, 서촌은 아디다스가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러닝 특화 공간으로 러너들의 실제 동선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지하 1층과 1층을 합쳐 약 200㎡, 60평 남짓한 규모다.


1층에서는 브랜드의 성격이 곧바로 드러난다. 서울 마라톤 관련 제품을 앞세운 '런치 존'을 중심으로 아디제로 라인이 펼쳐지고, 발 길이와 폭을 측정해 맞는 러닝화를 추천하는 풋스캐너가 놓여 있다. 아디다스가 자사 매장에 이 스캐너를 들인 것은 서촌이 처음이다. 지하 1층은 결이 다르다. 오리지널스를 기반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고객이 직접 참여하는 '메이드 포 유' 존에서는 서촌 러닝 코스와 다양한그래픽을 활용해 티셔츠와 신발을 커스텀하고, 신발끈을 고정하는 듀브레에 원하는 문구를 새길 수 있다.

이 매장의 진짜 주인공은 공간 밖에 있다. 매장 앞에서 출발해 GPS 기록을 따라 약 9킬로미터를 달리면 지도 위에 강아지 모양의 실루엣이 완성된다. 이른바 '댕댕런' 코스다. 방송을 통해 소개되며 러닝 입문자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졌고, 주말이면 완주를 마친 러너들이 매장 앞에서 기록을 인증하는 풍경이 이어진다.


살로몬 트레일 런 서울은 서촌에 자리한 트레일 러닝 전문 공간이다. 2025년 4월 문을 연 이곳은 살로몬이 세계 최초로 선보인 트레일 러닝 전문 스토어로, 인왕산과 북악산이라는 지형을 곁에 둔 입지를 겨냥해 알프스 베이스캠프를 콘셉트로 삼았다. 인왕산 5킬로미터, 북악산 7.5·11킬로미터, 안산 9킬로미터 등 난이도가 다른 코스를 전문 코치들이 세션으로 운영해, 입문자부터 숙련된 러너까지 저마다의 수준에 맞춰 산을 달릴 수 있다. 레이스 도중 수분을 보충하고 장비를 정비하는 '체크 포인트' 개념을 공간에 들여와, 샤모니의 베이스캠프 감성을 서촌의 결로 재해석한 점이 특징이다. 장비를 빌려주는 렌탈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지는 않지만 트라이얼 서비스 개념으로 러닝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에게 맞춤 체험 서비스가 제공된다. 살로몬 서촌 관계자는 일주일에 1회, 매주 목요일에 진행되는 트레일 런 클럽은 매주 성황리에 모집이 된다고 하며 매주 약 25명 내외의 모집 인원이 참여한다고 전했다.


뉴발란스 런 허브 북촌은 2025년 3월 리뉴얼 오픈한 체험형 매장으로 러닝화와 의류를 대여해주고 인근 러닝 코스를 안내하는 방식으로, 러너가 빈손으로 찾아와 달리고 갈 수 있는 거점 역할을 하는 북촌에서 꽤나 상징적인 공간이다. 발 모양을 측정해 맞는 제품을 추천하고 짐을 맡아주는 서비스까지 더해, 하루에도 수십 팀의 러너가 이곳을 거쳐 간다.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 관광객의 발길도 이어지는데, '서울'이 새겨진 제품은 외국인 방문객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고 한다.

굿러너 컴퍼니 북촌은 한옥의 외관과 정취를 그대로 살린 러닝 편집숍이다. 러닝을 사랑하던 세 명이 러닝 대회와 이벤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에이전시로 출발해 지금의 편집숍으로 키워낸 곳으로, '기록을 단축하는 달리기'가 아니라 '오래 달리는 방식'을 제안한다는 철학을 내세운다. 구하기 어려운 다양한 러닝화를 직접 신어보고 테스트할 수 있으며, 북촌을 기반으로 한 정기 러닝 프로그램을 운영해 커뮤니티의 거점 역할도 겸한다. 안국역에서 북촌 한옥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해, 달리기와 동네 산책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매장이 아니라 아지트: 커뮤니티 허브형 리테일의 부상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된 시대에, 오프라인 매장이 제품만 팔아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스포츠 브랜드들이 매장을 '러너들의 아지트'로 정의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뉴발란스 북촌, 온 유어 마크 같은 매장은 러너가 짐을 보관하고 옷을 갈아입는 락커룸과 샤워실을 갖췄다. '매장에 짐을 맡기고, 서촌·북촌 코스를 달리고, 돌아와 씻고 브랜드를 경험하며 제품을 구매하는' 자연스러운 동선이 완성된다.

과거의 리테일 매장이 이미 형성된 상권의 유동인구를 흡수했다면,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러너가 짐을 맡기고(Locker), 신제품을 대여해 달린 뒤(Trial), 돌아와 씻고 마시며 소통하는(Community) 문화적 인프라로 기능한다. 코스가 곧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가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긍정적 경험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다.

그런 효과는 매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러닝 코스와 인근 카페를 묶은 추천 게시물, 러닝 매장·편집숍·카페를 하나로 엮은 코스 콘텐츠가 확산되면서 러닝 매장과 주변 F&B가 함께 활성화된다. 매장 하나가 상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다음은 무엇인가


이 흐름은 도심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여의도에서는 더현대 러닝클럽과 뉴발란스 여의도 런 허브가, 서울숲에서는 무신사 런 서울숲과 굿러너 하우스가 러너들을 끌어모은다. 러닝을 축으로 한 리테일 거점이 서울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러닝관련 매장이 늘어난다가 아니다. 리테일의 입지 논리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권은 유동인구가 만든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길목에 매장이 들어서고, 그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것이 리테일의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나 러닝이 만든 지도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서촌과 북촌은 애초에 대규모 유동인구로 붐비는 상권이 아니었다. 이곳을 상권으로 만든 것은 러닝이라는 문화, 그리고 그 문화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다. 브랜드는 이제 유동인구를 좇아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에 올라타기 위해 들어왔다.

이것이 핵심적인 전환이다. 이제 상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가 그곳에 모여 있는가'로 형성된다. 러닝처럼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집단적 문화가 하나의 동네에 자리 잡으면, 브랜드는 그 문화의 맥락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기 위해 말 그대로 기꺼이 찾아온다.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리테일에서, 문화적 흐름에 탑승하는 리테일로. 서촌과 북촌은 이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축은 이 문화가 국경을 넘는다는 점. 경복궁과 청와대, 한강을 잇는 서울의 러닝 코스는 그 자체로 서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인데 GPS 위에 그려지는 고궁 러닝의 궤적은 외국인 방문객에게 매력적인 여행 경험, 이른바 '투어 런'으로 소비될 여지가 크다. 단순히 한복을 입고 고궁에서 사진만 찍는게 아니라 더 깊게, 더 색다르게 한국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에게 이만한 콘텐츠가 없다. 러닝이라는 글로벌 공통 언어에 서울 고유의 정취가 얹히면, 브랜드에게는 전 세계 러너를 서울로 불러들이는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K-러닝 맵이 K-컬처의 다음 장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러너들의 발걸음은 이미 상권을 바꾸고 있다. 유동인구가 아니라 문화가 상권을 만들고, 그 문화가 국경을 넘어 확장되는 흐름. 코스가 콘텐츠가 되고 매장이 커뮤니티가 되는 이 변화가 서울의 리테일 지도를 어디까지 새로 그릴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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